'인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6.23 광해군과 능양군의 관계 인조에 대한이야기
  2. 2015.05.30 인조와 병자호란 이야기 -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광해군과 능양군의 관계 인조에 대한이야기


광해군과 능양군의 관계 인조에 대한이야기



능양군의 무력 반정 배경

인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던 선조였지만 임진왜란과 그밖의 여러가지 이유로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에서 밀린 인빈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은 항상 불만을 갖고있었다. 후에 광해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그녀의 소생중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지목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능창군을 신경희 사건과 연루시켜 사사하고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자 능창군의 맏형인 능양군은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던 서인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다.대략 광해군과 능양군의 관계

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ㅜㅜ


1623년 4월 11일 광해군15년 김류를 중심으로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능양군을 왕위에 앉히고 서인들이 조정에 핵심이 되는 사건이 바로 이사건이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왜 하필 서인들은 무능한 능양군을 왕위에 앉혔을까?하는

생각이 매우 궁금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과연 권력일까? 

아니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일까요? 과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선조와 인조는 무능함의 끝을 보여주었고 둘 다 조선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잘난 아들들을 질투했던 찌질한 왕들입니다.

앞을 선조와 인조를 선조와 인조라고 부르지 말고 하성군과 능양군으로 부릅시다.

광해군같은 위인은 추존이 되지 않아 광해군이라 부르고

선조, 인조와 같은 인물들은 왜 선조, 인조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는 불공평합니다.

광해군을 광종이나 광조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오버인 것 같고

다만 선조와 인조를 하성군과 능양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해군과 능양군의 관계 이해되셨나요??

마지막으로 능양군인조에 대한 죄?에 대한정리입니다.



능양군의 죄?


1. 호란을 초래하여 무수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대량학살죄

2. 아들을 죽인 존속살인죄

3. 며느리에 대한 무고죄

4. 며느리를 죽인 존속살인죄

5. 무고한 손자들을 유배하고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무고죄, 존속살인죄

6. 정묘호란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직무유기죄

7. 병자호란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직무유기죄

8. 이괄의 난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직무유기죄

9. 간악한 요부와 놀아나서 배겟머리송사로 궁중과 왕실과 나아가서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리고 문란시킨 풍기문란죄

10. 숙부의 왕위를 찬탈한 반역죄


 


이밖에 또 뭐가있죠? 이건뭐 거의 이준석 선장보다 더 패륜적이고 반인륜적이고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범죄자네요.

어찌됬든 결론은 거열형에 합당한 A급 범죄자라는거 ㅡㅡ;;;

아무튼 광해군과 능양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마무리합니다.

마음이 아프네요 ㅜㅜ


인조와 병자호란 이야기 -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인조와 병자호란 이야기 -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많은 분들이 역사를 바라볼때 신나고 즐거운 역사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민족이 우수하고 강한 민족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역사를 그리워하는 반면에

외세의 침략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는 외면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이런 수치스런 역사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알아야, 다가오는 미래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살았던 잠실에 비석 하나가 있었습니다.

석촌호수 근방에 있었는데, 석촌호수에는 롯데월드와 공원이 있어서 자주 놀러갔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는 이 비석 앞에서 경찰과 어떤 사람이 실갱이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 비석은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라며

빻아서 없애야 한다고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면서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이 비석이 바로 병자호란을 상징하는 [삼전도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전도비]는 조선을 침략한 청태종의 공덕을 기록한 비석인데,

청나라의 강요로 할 수 없이 만들어 세운 비석입니다.

오랑캐에게 나라를 짓밟힌 것도 너무 수치러운데 침략자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까지 세웠으니

대다수의 조선 사대부들은 [삼전도비]를 경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삼전도비]는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1895년 고종황제는 민족의 수치를 제거한다는 의미로 [삼전도비]를 땅에 묻어버렸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사학자들이 찾아내 다시 세워놓았습니다.

광복 후 주민들이 다시 매립하여 자취를 감췄다가, 1963년 큰 홍수가 나면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습니다.

이 후 현위치에 자리를 잡아 세우고 지역문화재로 지정 관리해 왔는데

몇 번이나 비석에 페인트를 칠하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보호각을 짓고 훼손 방지를 위한 CCTV까지 설치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역사에 있어서 가장 치욕스러운 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삼전도비]와

이 비석이 세워지는 역사적 사건인 [병자호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삼전도비 - 대청황제공덕비)

(삼전도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식을 치룬 장소였음)


 

 (삼전도비를 훼손하려는 사진 중 하나 - 2007년 발생)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격렬히 반대하였던 서인세력들은 더 이상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1623년 음력 3월 12일.

서인 반정군 1.400여명은 대궐을 급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보좌에 올리게 되니,

그가 바로 조선 16대 임금 인조입니다.

인조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광해군을 강화도로 위리안치(가시울타리 집에 구금)시키고,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들을 모두 숙청하여 사사하거나 유배보냈습니다.

이로써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인조와 서인정권들은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것은 [재조지은](再造之恩 - 나라를 다시 세운 은혜)이라고 하면서

명나라를 섬기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숭명배금] 정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인조 5년.

이를 괘씸하게 지켜보던 청태종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장수 아민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습니다.  

이괄의 난으로 내전을 겪은 조선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10일만에 평양이 함락되자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피신을 떠났습니다.

[정묘호란]이라고 불리우는 청나라의 침입으로

조선은 또다시 전 국토가 전쟁상황으로 치닫는가 했지만 이 전쟁은 쉽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청나라도 명나라와 치열한 전쟁중이었기에 조선과 계속해서 전쟁을 치룰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청나라가 조선을 적대국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을 형제국으로 여기고 조선과 친하게 지내므로, 명나라와의 전쟁에 몰두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조선과 청나라는 [정묘조약]을 맺고 서로 형제국으로 지낼것을 약속하므로

[정묘호란]은 쉽게 마무리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점점 청나라의 국력이 강해지자 더욱 더 명나라를 압박하게 되었고

청태종 홍타이지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선포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에는 황제즉위식에 참여하는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긴다는 칙서를 받아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청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격분하였습니다. 

오랑캐와 형제국을 맺은 것도 나라를 살리기 위한 어쩔수 없는 눈물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오랑캐를 황제국으로 섬기라는 요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주전파들이 나라가 멸망하더라도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신만이라도 보내 청나라의 비위를 맞춰보자는 주화파의 간절한 설득으로 간신히 사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로 간 사신단들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청태종의 황제즉위식에는 조선뿐 아니라 많은 주변국들도 참여하였습니다.

큰 제단이 만들어졌고, 황제만 올릴 수 있는 하늘에 대한 제사가 있는 후

청태종 홍타이지를 황제로 섬기겠다는 주변국 신하들의 단체큰절이 있었습니다.

구호에 맞춰 다른 주변국 신하들은 모두 큰절을 하였는데, 오직 조선 사신들만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황제즉위식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청나라 군사들이 조선 사신들을 즉결처분하려고 하였습니다.

청태종의 만류로 조선 사신들은 목숨을 건져 조선으로 돌아 올 수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큰 흑암이 조선에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정묘호란의 전쟁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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