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이순신 충무공 전사



노량해전 이순신 충무공 전사

그러나 명나라 장수들은 달랐다. 아니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저들의 산하가 절단 난것도 아니고 부모형제나 처 자식이 도륙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일전쟁의 불똥이 자기들의 나라에 튀기는 것이나 걱정하면 되는 외인부대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전란의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저들 군대를 위해 군량미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등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했다. 저들은 대국에서 출동한 원군이었으니까!

 

정유재란은 임진란의 침공 때 보다 그 기간은 훨씬 짧았으나 일본군의 만행은 더욱 잔인무비한 것이어서 명량해전에 승리한 후 남해안 일대를 돌아 본 이순신의 눈에 비친 조선의 산하는 인간지옥 그 자체였다.




노량대교에서 본 노량해전 앞 바다 -  이순신은 독안에 갇힌 고니시를 이곳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궤멸시키고자 하였다. 노량해전 위치는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임진년의 침략때는 궁극의 목적이 명나라 침공이었으므로 한양까지 불과 20일 만에 주마간산 격으로 한걸음에 달음질치다시피 북상하였으나 정유재란 때에는 이와 달리 침공의 주목적이 조선 영토의 할양이었으니 보다 철저하게 이 땅을 짓밟아 나갔던 것이다. 

 

이제 서서히 7년 간의 조일전쟁은 노량해전 그 최후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고, 이순신이 우리 민족사의 성스런 재단에 고귀한 피를 뿌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량해전 후 이순신의 마지막 목표 중의 하나는 전남 예교성에 농성 중인 고니시의 부대와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가 올 일본 함대였다.

 

이순신은 명량대첩 후에도 여러 해전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며 마지막 일전을 위해 선박의 건조에 힘을 써 60여척의 전투함을 확보하였다. 이순신의 전인무비의 위대성은 나라의 별 도움없이 군량미와 함선 등 군수물자를 스스로 조달해서 쓰면서 연전연승의 기적을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동상 - 일본 거상의 아들로 대마도주가 그의 사위였다. 일본 통일 전쟁시 성공적인 군수물자의 조달로 토요토미의 신임을 얻어 구마모토현 우토성의 영주가 되었다. 조선의 침략을 적극 반대하였다고 하나 조일전쟁 때에는 선봉장인 제1군으로 187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동대문을 통해 가장 먼저 한양에 입성하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사후 천주교 성자로 추서 되었다. 조일 전쟁 초기에는 가토 기요마사와 치열한 경쟁을 하며 승승 장구하였으나 평양성 패전 이후 계속 고전하며 많은 부하들을 잃었고, 이순신이 바다를 봉쇄하는 바람에 전남 예교성에 갇혀 있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쓰 군에게 참수되었다.

 

한편 1598년 7월 16일 명나라의 진린이 명나라의 수군을 이끌고 이순신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진린은 대국에서 파견된 원군으로 조명 연합 수군의 주장이었다. 진린은 조선관리의 목을 매어 말로 끌고 다니는 등 성격이 매우 사납고 탐욕스러운 자였다. 이러한 진린을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유성룡은 이순신과의 마찰을 예견하여 전투에서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크게 염려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러한 진린을 때로는 구슬리고 때로는 당당하게 맞서며 지혜롭게 다루었다. 문제는 탐욕스런 진린을 노린 고니시의 뇌물작전이었다. 이러한 고니시의 계략을 모를리 없었던 이순신은 오로지 노량해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면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다가왔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예교성에 갇혀있던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사천, 고성, 부산, 남해에서 각각 발진한 500여 척의 일본 함선이 15000명의 일본군들을 거느리고 노량해전 앞바다를 뒤덮었다. 이에 대항할 조명연합군의 함선은 조선 판옥선 60여척과 진린의 명나라 함선 200~300여척이었다. 뇌물을 먹은 진린은 이순신의 단호함에 눌려 마지못해 따라나선 격이었다. 


노량대교 - 일본군함 500여 척과 조명 군함 350여 척이 건곤일척의 최후 결전을 위해 이 고요한 노량해전 앞바다를 뒤덮었다. 도망치려는 일본군과 이를 궤멸시키려는 조명 연합 함대 간의 전투로 음력 동짓달의 차가운 바닷물은 금새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칠흑같은 겨울 바다의 고요를 뚫고 쉬익 소리를 내며 공격개시의 불화살이 캄캄한 밤하늘에 별똥 별 처럼 치솟았다. 차가운 겨울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일 장엄무비한 최후의 일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장소는 예교성의 길목인 노량해협의 좁은 바다였다. 조명 연합군의 예기치 않았던 공격을 당한 일본군도 격렬히 저항하였다.

 

한 겨울의 고요한 바다에 조일 전쟁 최후의 살육전이 펼쳐졌다. 조명 연합군은 길목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고, 일본군은 살금살금 기어들어왔으니 일본군이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경우 조명 연합군이 몰아치는 공격에 후미가 폭우 속의 흙더미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으므로 활로를 찾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해협의 좌측이 열려 있음을 알고 절망 중에 한 줄기 빛을 찾은 것 처럼 안도하며 뱃머리를 좌안으로 돌리고 맹렬히 뺑소니를 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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