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누구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년 2월 2일 ~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모든 사무라이의 내전을 조선으로 돌리고, 대륙 확장의 야망을 꾼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내에서는 이 인물이 영웅적일지는 몰라도, 다만 우리에게는 이 인물은 아마 적대적일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생-


(풍신수길이 태어난 오와리쿠니[아이치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국, 아이치 군에서 하급 무사 기노시타 야우에몬(목하미우위문)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가 처음 태어났을때의 이름은 고자루(소원)였다. 아버지 기노시타 야우에몬(목하미우위문)이 죽자

어머니 나카(なか[가운데])는 지쿠아미(죽아미)와 재혼하지만, 양아버지의 학대로 집을 뛰쳐나온다.

그 후는 설이 여러개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만날때부터 다시 적겠습니다.

 

-인정을 받는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54년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된다.

항상 신발을 들고 노바나가의 뒤를 따라다녔으며, 히데요시는 그의 곁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솔선수범하여 큰 성과를 내보였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는 그의 충실함을 보고 가문내에서 두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며, "넌 원숭이 또는 대머리쥐 같이 생겼다" 라고 자주 놀렸다.

156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네네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1582년 6월 21일 오다 노부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고 노부나가의 원수인

아케치 미쓰히데와 시미즈 무네하루를 물리쳤다.

히데요시는 천하인을 자처했으며, 그의 오사카 성에는 늘 오다 노부나가에게 물려 받았다는 천하포무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또 자신의 칼에도 천하포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천하포무란? 노부나가는 천하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아마 그 뜻이 아닐까 싶다.

 

-센고쿠 시대의 끝, 전국통일-

 

1583년 사바타 가쓰이에와 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그는 1583년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 성을 축조한다.

1584년 조정에서 쇼군 임관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1585년 3월 10일 히데요시는 내대신에 위계 임관되었다. 그리고 21일 사이카 무리와 전투를 벌였다.

도도 다카토라(등당고호)를 통해서 사이카 무리의 지도자 스즈키 시게오키를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기슈는 도요토미 정권의 땅이 되었다.

또한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대해서도 큰 승리를 이끌어, 시코쿠 정벌에도 성공한다.

다이진 간파쿠의 지위를 겸임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9월 9일 도요토미의 성을 하사받아, 그는 현 이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름을 살펴보자

기노시타 도키치로 -> 하시바 히데요시 -> 후지하라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0년 고호조 가문의 이노마타 구니노리가 나구루미 성을 탈취하자,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는 군을 간토로 돌려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오다와라 성은 예전에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도 함락하지 못한 성이었지만,

히데요시는 3개월간에 공성 끝에 오다와라를 함락시켜 오다와라 정벌에 성공하였다.

 

최후의 적 고호조 가문을 물리치자 천하를 통일하였다.

죽은 노부나가와 자신의 숙업인 통일을 이룩하여 100년간에 센고쿠 혼란을 수습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전국시대는 막이 내린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을 꿈꾸며 2년 후인 1592년 20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와 소 요시토시(종의지) ,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 다테 마사무네(이달정종)

사마즈 요시히로(도진의홍) 등의 상당수 다이묘들이 조선으로 군사를 내보내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히데요시는 모든 반대를 무릎쓰고 출전시켰다. 다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속 반대하여, 군대를 불참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먹을 정도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계획은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

도 진행되어 1592년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전쟁이 시작된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종교적 문제와 성격적 문제등 여러가지로 인하여 서로 적이라는 걸

파악했기 때문에 둘을 선봉장으로 삼어 둘이 경쟁하여 조선을 빨리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초기에는 조선군을 격파하여 파죽지세 몰아갔으나,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갑작스런 이순신과 수군의 등장

또한 명의 원군으로 인해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1593년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된다.

 

참고 :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리스도와 온건파,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와 급진파

 

 

-정유재란-


 

1596년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었다.

1597년 14만 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재침략 하였다.

칠전량 해전을 시작으로 2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를 석권하고 경기도로 나간후

조선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여 점령을 꾀하기 시작한다.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하자, 전선을 축소하려는 무단파와 문치파간에 대립이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향년 61~62세로 전사한다.

그가 죽은 이유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번. 1598년 5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그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2번. 뇌매독으로 인하여 사망

3번. 심유경이 독살했다는 설

4번. 위암

(? 난 히데요시가 초밥먹고 목에걸려 죽은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누구지?)

히데요시는 아마다산에 매장되었지만, 장례는 조선에 나가있는 왜군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치루어 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무덤은 꽝~ 폭파되어 소멸하고 만다.

또한 그의 후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또한 마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참수형에 당함으로써

도요토미 계는 단절되고 만다.

그가 병사하고 7년 간 끌어오던 전쟁은 패하고 일본군은 총 퇴각을 명한다.

이 전란을 통해 일본은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귀나 코를 베어가는 등 잔학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로써 만들어진 무덤이 바로 귀무덤이다. 일본에 있슴

왜군만 그랬도냐? 명군도 그랬다.

명군도 일본 대가리만 가지고 오면 상준다는 말에 일본인과 닮은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갖고왔다고도 전해진다. 여하튼 짱깨나 원숭이나 둘다 비정상이다.

또 조선의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하고 2~3만 명의 도공인들을 납치하여 도자기 문화 같은 에도시대의 화려한

문화 발전을 이룩하는 터전으로 삼았다.

 

그가 사망한후, 병력을 전혀 쓰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과 도요토미 충성 세력간의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요토미 지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졌다.

이로써 도요토미 정권은 2대째에서 막을 내린다.



rss RSS FEED